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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HN CYCLE

2023. 08. 22 - 2023. 09. 26
이종목, 정헌조, 김지훈, 거니림, 김영환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다. 철학자이자 수학자, 물리학자이기도 했던 라이프니츠의 말에 따르면 음악은 자신이 계산한다는 것을 모르는 정신의 산술 연습이라고 한다. 그의 말처럼, 다른 방향을 가진 듯한 두 세계는 서로 통하는 면이 있다. 이러한 맥락의 연장에서 미술의 가치를 찾는다면, 미술은 인간 정신을 물질세계에 구현하는 연성과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동양 미술사적 유산을 쿤사이클이라는 과학적 서사에 대입한 이번 전시는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기획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서양화와의 이항대립적 관계를 통해 구체화된 동양화라는 미술개념은, 타자의 시선 속에 위치해 있는 실재(實在)의 식민지적 현실을 반영해 왔다. 이러한 개념적 유산은 90년대 탈식민주의 이론의 대두 이후 동시대미술에 흡수된다. 이후 한국에서의 동양화라 지칭되는 예술활동은 정체성을 잃고 혼란을 겪으며 미술시장과 교육, 전시환경에서 모두 맹목적 외면현상을 겪기도 했으나 종국에는 이러한 위기적 단계를 지나 지역성 문법을 토대로 자신의 영토를 확장시키는 새로운 단계를 맞이하고 있다. 이는 마치 절정에 있던 엔트로피가 다시 낮아져 새로운 가능성을 뿌리게 되는 것과 유사하다. 이러한 시기를 맞이하기까지 동양화라는 유령은, 자신의 정체를 시대와 관계하며 드러내거나 숨겨왔다.

 

오늘날 동양화를 다루는 작가들은, 세계화된 현대인은 뿌리를 잃고 부유하는 존재라고 말한 니콜라 부리요의 말처럼 민족이나 지역 특수성으로 공유된 소주제로 작업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편 이들은 전통 조형의 탐구, 동양철학의 해석을 통해 그리고 옻칠, 금박, 자개, 도자 등의 촉각성을 탐구해 회화의 영역에서 공예나 설치미술과 같은 다각화된 영역으로 확장해 나가는 작업도 진행하고 있다. 이들은 개인의 차원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지만, 분명 시각적으로 관찰되는 동질감 또한 지니고 있으며, 여기서 나타나는 전통문화 유산이라는 하나의 공통된 동시성은 파편화된 시대에서 가치를 찾는 하나의 대안으로써 가능성을 지닌다. 바로 이것이 쿤사이클이라는 과학적 서사가 이번 전시 참여작가들과 조우하는 지점이다. 우리는 이 전시를 관람하면서 이 커다란 서사를 이끌어온 한국미술사의 주역들을 다시한번 상기해볼 수 있다. <토마스 쿤, 과학혁명의 구조>

 

한용주 (서울대 과학학과 박사과정)

 

과학사학자 토머스 쿤(Thomas Kuhn)이 1962년 출간한 책 『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는 기념비적인 책이다. 이 책에서 쿤은 과학의 발전을 새로운 관점에서 해석하여 과학사와 과학철학뿐만 아니라 역사학을 비롯한 인문학과 사회과학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토머스 쿤이 제목에서 말하는 ‘과학혁명’이란 과학자의 세계관이 근본적으로 변형되는 과학 발달 과정에서의 일련의 사건들을 의미한다. 쿤은 여러 위대한 과학적 성취의 본질이 알려진 것과 다르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과학의 본질을 재검토하고자 했다.

쿤의 책, 『구조』는 과학혁명 과정을 도식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쿤은 책을 통해 누적적이고 단선적이라 생각할 수 있는 과학의 발전이란 외려 순환적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일반적으로 과학은 하나의 패러다임 속에서 퍼즐 풀이로서 기능한다. 그러나 더 많은 과학적 발견, 변칙 현상이 발견될수록 점차 그 문제 풀이에 어려움을 겪게 되고 기존의 패러다임, 정상적이었던 과학은 위기에 봉착한다. 이 정상 과학의 패러다임은 쉽게 다른 패러다임으로 대체되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게슈탈트 전환과 매우 유사한 일종의 혁명이 필요하다. 패러다임은 서로 공약 불가능하기에 이러한 혁명은 곧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후일 결정적 발견이나 실험으로 여겨지게 될 성과들이 점차 쌓이며 새로운 패러다임은 기존 패러다임을 대체할 구색을 갖춰간다. 이러한 비가시적인 혁명을 거쳐 새로운 패러다임은 과거의 패러다임과 다른 세계관, 그러니까 새로운 정상 과학을 만들어낸다. 새로운 정상 과학은 과거 패러다임의 이론이나 용어를 일부 포함하지만, 이전과 같지는 않게 된다.

이러한 과학혁명 과정을 잘 따르는 유명한 예로는 코페르니쿠스 혁명이 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 천문학은 꾸준히 문제 풀이를 위해 복잡해져만 갔다. 코페르니쿠스가 제안한 태양중심 천문학은, 그가 최초에 제안했을 때는 기존의 패러다임(지동설)을 대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정상과학의 위기가 무르익어 가는 과정에서 케플러, 허셜을 비롯한 여러 천문학자들이 태양의 흑점, 혜성, 소행성 등을 발견하며 천동설을 발전시키고 지동설로부터의 변화, 즉 천문학에서의 혁명이 점차 만들어질 수 있었다.

쿤의 『구조』는 역사학 전반, 그리고 여러 인문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학자들은 정상과학과 과학혁명의 사이클을 다른 분야에도 적용할 수 있는지 시험했다. 쿤은 서론에서 예술철학자 스탠리 카벨(Stanley Cavell)과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음을 밝힌 바 있다. 쿤은 과학 혹은 과학자 공동체가 내재적이고 비전적(esoteric)이라는 이유로 예술으로의 적용에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쿤의 사상을 발전시킨 후대의 과학학 연구자들은 과학이나 과학자 공동체가 다른 관념들이나 집단과 질적으로 어떤 관계를 맺는지 많은 연구를 진행해왔다. 그 결과 과학과 예술의 틈은 어느 때보다도 좁아 보이며 쿤의 아이디어는 여전히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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